1.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저자/ 김박은경

출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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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p,

자자, 이제 그것에 대해 써보자 하는데 또 쓸모없는 것을 쓴다고 근심하는 당신에게 써야지. 쓸모없음을 사랑해요, 나는 당신의

 

 

14p,

힘을 빼세요 힘을 어떻게 빼더라 힘을 빼는 건 힘이 드는 일, 그래도 곧 끝날 거야 그래서 곧 끝날 거야 (...) 될 일이 된다면 안 될 일은 안 되겠지 애쓰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니

 

 

15p,

우리는 한 장 종이의 앞뒤로 이어져 각각의 자리에서 각각의 연필로 적어 내려가는 거야 (...) 그만하자, 그런 말도 그만하자 의미를 찾고 싶겠지 알고 싶겠지 지친 호흡기를 떼어내는 손처럼 말라버린 뿌리를 들어내는 삽처럼 시한이 다하는 마침표를 위해 드라마틱한 까닭이 필요하겠지 (...)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구나 너는 사랑을 참 헤프게도 쓰는구나

 

 

24p,

발 맞추어 걷는 녹사평은 푸른 풀이 무성한 들판, 그러나 이미 풀을 잃은 청회색 골목에서 우리는 조금 취한다

 

 

25p, 「혼수」

울지 않으면 슬프지 않은가 슬픈 일마다 울어야 하나 정신이 사라진 몸이라면 회복될 수 없는 병이라면 겨울 강의 물고기처럼 얼어붙어버렸다면 바라보기는 하지만 느끼지는 않는다면 언제까지라도 계속할 수 있지만 잊을 수가 없다면 잃어버리고도 멈출 수가 없다면 허망으로 남은 생을 지탱해야 한다면 이쪽과 저쪽은 다르지 않다 나란하다 (...) 이게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햇살 마지막 인사 마지막 숨을 지나 마지막의 가장 마지막은 언제 옵니까 울고 나서 할 일은 울음을 그치는 일 살고 나서 할 일은 살기를 그치는 일, 그나저나 이것은 꿈과 같군요

이쪽; 울고, 살고

저쪽; 울음을 그치고, 살기를 그치고

 

 

34p,

불안과 불신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낙관했겠지

 

 

36p,

골목은 있고 건물은 있고 간판은 있고 그늘은 있고 햇살은 있고 외면은 있고 예감은 있고 바깥은 초가을 청청한 숨이 도는데 바람은 없고 창은 없고 물기는 없고 계절은 없고 기척은 없고 축복은 없고

 

 

41p,

구부러진 못을 보았다 두 동강 난 못을 보았다 못 천지였다 (...) 최선을 다 했겠지 최선 대신 비가 왔던가 왔겠지 천지의 천치라니 한 번 오므리고 한 번 펴고 (...) 모두는 어디를 향하는 걸까 모두의 모두는 모두에 있을 텐데 헝클어져 찾을 수 없는 이것의 모두는 어디쯤일까, 내가 부러진 못이 아니라 다행이다 (...) 둥글고 희고 긴 팔목 위로 햇살이 기어간다 간지러워 이마에 팔을 올리면 쉽게 구부러지는 커다란 못이 부서지기 쉬운 아슬한 것이 익숙한 비린내가 어디선가 훅,

피에는 철 성분이 있어서 금속과 비슷한 냄새―비린내―가 난다는 걸 생각하니 유독 좋게 다가온 문장. 팔이 구부러지면 못이 부서지고 비린내가 훅,

 

 

51p,

알아볼 때마다 확연해졌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살아났다 (...) 부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간절하여 영원을 뒤덮는 부재가 된다 이미 없는 사람이 들린다 보인다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는 사랑 같은 거 믿지 말자고, 그러나 꽃 피는 병에 걸려 기어이 피어 말라죽는 꽃들의 무덤은 왜 이리 향기로운가, 세상에 없는 사람아 그냥 살자 이렇게 함께

 

 

66p,

여기 나무가 있었다 세상의 나무가 아닌 단 한 그루의 나무, 늦은 밤 나의 휘파람과 한숨과 혼잣말을 들었던 커다란 그 나무는 지금 없다 없지만 있다 알고 있으니까 잊지 않았으니까 아직 있다 있을까

 

 

68-69p,

너에 대해 생각할 때면 심장이 제멋대로 뛴다 심장이 이상해서 나는 이상하다 심장의 심정을 알고 싶지 않아 알면 괴로워지겠지 괴로워서 사랑하고 싶겠지 사랑을 생각하면 너를 생각하면 까닭도 없이 행복해져서 심장이 빠르게 뛰겠지 유월이 오기도 전에 끝날 수도 있겠지 시월은 꿈도 꿀 수 없겠지 세상에 날 때 품고 오는 숨이 있어서 소진하면 끝이라면서 여분은 없다면서, 지금 어디 있니 궁금해 알고 싶어 심장이 뛴다 간다 빠르게 가까워진다, 어서 손을 잡아줘

 

 

73p,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알아 전혀 모르겠다니 그건 모르겠다 사랑하는 걸 사랑하고 미워하는 건 미워해 좋은 게 좋은 거지 싫은 건 싫다 예쁜 게 예쁘고 웃긴 게 웃기고 (...) 사랑이 사랑을 어쩔 수 없듯이 너도 너를 어쩔 수가 없으니까

 

 

79p,

함께 부풀어 차오르고 넘치고 젖고 다시 마르도록 우리가 누군지 잊지 않을 거야 떠도는 바람은 떠돌게 하고 깨진 바람은 깨지게 하고 다음 스텝을 멈추지 않을 거야 밟는 곳마다 빛이 날 거야 가는 곳마다 빛이 될 거야 사랑하니까 그렇게나 사랑하니까

떠돌고 방황하고 깨진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고 멈추지 않고 그것까지 안무가 되어 춤이 되어 다음 스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