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용한 하루

 

조용한 하루

저자/ 오수영

출판사/ 고어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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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p,

해변과, 바다와, 하늘. 제각기 분리된 부분인 듯하지만 바다를 생각할 때는 어느 한 부분만 떠올리지는 않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경계를 명확하게 나눌 수는 없어도, 바다는 모든 부분을 포괄한 하나의 풍경으로 기억된다.

바다를 담은 그림을 보는 순간 사랑의 감정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31p,

사랑한다는 말은 어쩌면 최후의 언어라서 끝까지 아껴두고 싶지만,

 

 

57p,

글을 사랑하는 마음들, 아직도 책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순수한 마음들, 생존 앞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끈을 간직한 마음들, 글을 다룰 때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마음들, 실망과 좌절의 반복에도 다음을 이야기하는 미련한 마음들, 그런 마음들이 사람을 이어줬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새로운 책을 만든다.

 

 

66p,

사랑과 낭만을 모를 리가요. 그것만으로 살아가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67p, 「사랑의 흔적」

사랑이 떠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겨질까.

사랑의 흔적이란 망각의 강물 위를 가까스로 떠다니다 가라앉는 부유물에 불과할까. 사랑하는 연인들의 시간이 이별과 함께 세상에 한순간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지워진다면, 그 적막하고 절대적인 공허를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을 리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로 삼기에는 너무도 분명하게 존재했던 사랑의 순간들.

지금의 내가 말하는 방식과, 옷을 고르는 취향과, 길을 가리키는 손동작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순전히 스스로 익힌 습관일까. 혹은 나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에 누군가의 흔적이 여전히 머물고 있다는 증거일까.

사랑의 경험을 돌이켜보지 않으면 똑같은 형태의 사랑을 반복할 뿐이고, 실패를 성찰하지 않는 사랑은 이전에 넘어졌던 곳에서 다시 넘어지게 된다. 무한한 실패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과거의 경험에서 학습을 이끌어내는 것. 흘러간 시절을 뒤돌아보며 충분히 잠겨보는 것.

사랑을 반추하는 일이란, 흘러간 시절로부터 다가올 미래에게 저나는 편지 같은 게 아닐까.

 

 

73p,

생각과 감정의 심연에 닿은 사람들을 동경했다. 그들처럼 깊어지고 싶은 마음에 그들의 문장을 읽으며 깜냥도 되지 않으면서 혼자 그들을 질투하고 시샘했다. 그래서 스스로 이해하지도 소화하지도 못한 생각과 마음을 문장으로 풀어내려 애쓰던 시절이 있었다. 모방과 표절의 경계에서 내가 어디로 더 기울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89p,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운 누군가에 대한 기억만큼은 예외적으로 거짓된 기억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사람들은 그 기억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달리 부르기로 했다.

 

 

110p,

어른들을 따라 마트에 온 아이들도 눈을 발견했는지 창문 쪽으로 뛰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눈이 내려요.

드디어라는 말이 참 예쁘게 다가왔다. 늘 듣는 흔한 말이지만 아이들이 말하는 그 말에는 소원이 담겨있는 듯했다. 나도 눈을 기다려 왔지만 그 말을 외칠 수 있는 순수함과는 다른 마음이었겠지. 그 시절의 꿈 같은 소원과, 지금의 단순한 바람은 아무래도 너무 먼 세상처럼 느껴진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다. 예쁜 장면들은 내 마음대로 예쁜 모습으로만 간직하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