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장면들

하지만 분명, 아무것도 남지 않을 리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랑이 있을 리 없었다. 돌이킬 마음 같은 건 없대도 다만 남겨진 장면들을 간직하고 싶었다. 찰나일지라도 내 삶에 존재했던 시간과 감정을 복기하며 흘러간 시절의 경로를 되짚어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외면하거나 부정한 채로 애먼 사랑의 생애만 탓한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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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신경 세포에 사랑의 장면들이 깃들어 있어서 지금의 나는 온전한 나 자신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거의 모든 총합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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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늘 소식보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 긴 세월 낡고 바래져도 소멸하지 않는 사람, 당신의 목소리에 창문을 열면 어느새 뒷모습뿐인 날들, 저 멀리 당신은 물결처럼 흩어지고 나는 홀로 다시 현실을 감각한다. 찰나가 아닌 시간은 없다지만, 결코 멀어지지 않는 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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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헤엄쳐 가고 있어. 습관이 되면 시작과 끝에도, 그리고 멈춤에도 행동의 당위가 사라지는 것 같아. 살아온 대로 살아갈 뿐 방향을 다시 설정할 엄두가 나질 않지. 그런데 가끔은 익숙한 습관에 의문을 품게 되는 날이 있잖아. 일상의 답답함에 질식할 것 같고, 삶의 의미 같은 걸 묻게 되고,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그런 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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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참여하는 당사자이면서도 늘 사랑을 겉돌던 이방인 같았던 나의 사랑. 학습이 더딘 아이처럼 사랑과 친밀해지는 데에도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엇이 그렇게도 낯설고 어려웠는지 나는 언제나 사랑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길을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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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낭만이라는 단어조차 꺼낼 수 없는 건조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 결국 내가 낭만을 간직한 이들을 비웃는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소한 그런 어른이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더 늦기 전에 내게도 분명히 존재했던 낭만의 흔적들을 종이뭉치에 눌러 담아 영영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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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쓰다 보면 이상하게도 참회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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